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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름 키퍼, 신화를 무너뜨리다, 독일미술, 기억, 재해석

by 차몽로그 2025. 4. 11.

키퍼 이미지
안젤름 키퍼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1945~)는 독일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나치즘 이후의 독일 정체성과 역사적 기억, 그리고 신화의 재해석을 중심에 두고 작품을 전개합니다. 그는 캔버스 위에 납, 흙, 철, 재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인간 존재, 문화적 트라우마, 그리고 신화 속 서사를 새롭게 조명합니다. 특히 키퍼는 북유럽과 성서의 신화를 통해 개인과 민족, 그리고 역사의 복잡한 관계를 풀어내며, '신화'를 오늘날의 시선으로 재구성하는 데 탁월한 시도를 보여줍니다. 이번 글에서는 키퍼의 신화 해석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그의 예술이 현대사회에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를 분석해 봅니다.

폐허 위의 신화, 독일의 기억을 말하다

안젤름 키퍼의 작업은 전후 독일의 기억을 마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태어났으며, 나치 시대의 역사와 독일 국민의 침묵을 날카롭게 직시한 예술가입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히틀러 경례를 취한 자신의 사진을 포함시키는 등, 금기시되던 역사적 상처를 끄집어내는 도발적 행위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이런 역사적 맥락에 ‘신화’를 더합니다. 특히 북유럽 신화와 독일 민족주의에 사용되었던 상징들을 가져와 그것을 재해석하고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 신화가 어떻게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Nigredo, Margarete와 Shulamith 등의 작품에서는 나치즘에 의해 이용된 신화적 여성상과 유대인 박해를 대비시킴으로써, 신화의 이면에 숨겨진 잔혹성과 진실을 드러냅니다.

키퍼에게 신화란 신성한 전통이 아니라, 철저히 비판적 해석의 대상입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신화 속에 내재된 폭력성, 차별, 배제를 폭로하고, 그것이 현재 사회에 어떻게 잔재하는지를 예술로 고발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신화 해석은 단지 미적 차원의 재현이 아닌, 역사와 윤리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이어집니다.

물질과 상징, 신화를 해체하는 방식

키퍼의 예술 세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사용되는 재료입니다. 그는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에서 벗어나, 납, 재, 철, 흙, 유기물 등으로 구성된 거친 재료를 사용합니다. 이러한 재료는 단순한 시각적 효과를 넘어서, 상징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납은 연금술에서 ‘변화’와 ‘정화’를 상징하는 금속으로, 키퍼는 이를 통해 신화 속 변형과 인간의 고통을 암시합니다. 재와 흙은 전쟁 이후의 폐허와 죽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로운 재생의 가능성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물질적 감각은 그의 작품에 일종의 ‘물리적 신화성’을 부여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텍스트 이상의 감각적 해석을 요구합니다.

또한 키퍼는 신화를 단순히 재현하지 않고, 재조합하고 변형합니다. 그는 바그너의 오페라, 구약 성경, 그리고 노르드 신화를 혼합하여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뒤흔들고,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엮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신화라는 고정된 의미를 깨뜨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인간의 의미를 발굴합니다.

현대미술 속 신화의 귀환

현대사회에서 신화는 단순한 전통 설화가 아니라, 정치적 상징과 문화적 코드로 사용됩니다. 키퍼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신화를 '해체'하며, 그것이 가진 힘과 위선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파르지팔 시리즈성경 속 인물의 초상들에서는 인물들을 신격화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적인 약함과 비극성을 강조합니다.

그의 신화 해석은 단순한 과거 회귀가 아니라, 현대 사회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유럽의 정치 위기, 전쟁, 정체성, 환경 파괴 등의 이슈들이 그의 작품에 은유적으로 반영되어 있으며, 신화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다시 ‘이야기’하는 방식은 강한 메시지를 지닙니다.

특히 그는 예술을 통해 ‘기억’과 ‘기록’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신화는 단지 옛이야기가 아니라, 반복되는 인간사의 상징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사회적 조건에서 다시 읽히고, 다시 쓰여야 한다는 것이 키퍼의 입장입니다. 따라서 그의 예술은 단순히 과거를 향한 향수가 아닌, 미래를 향한 비판적 예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젤름 키퍼는 신화를 단순히 아름다운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역사적, 정치적, 윤리적 문맥에서 다시 바라보는 예술가입니다. 그는 폐허 위에서 신화를 꺼내고, 그 잔해 위에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신화는 그의 손을 통해 해체되고, 재구성되며, 오늘날 우리에게 다시 말을 걸어옵니다. 키퍼의 작품을 마주할 때, 우리는 묻게 됩니다. “신화는 누구를 위해 쓰였고, 누구를 배제했는가?” 그의 예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는 역사이며, 기억이며,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