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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요이 쿠사마의 예술 세계관 분석, 환각, 무한, 자아소멸

by 차몽로그 2025. 4. 19.

야요이 쿠사마 이미지
야요이 쿠사마 Louis Vitton for 2012 collection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 1929~)는 일본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가이자, 세계적인 설치미술의 거장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을 넘어, 내면의 환각과 무한성, 자아 소멸에 대한 깊은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쿠사마의 반복적 도트, 끝없이 반사되는 거울방, 끝없는 공간을 형상화한 설치물은 모두 그녀가 평생 겪어온 정신세계의 투영입니다. 본 글에서는 야요이 쿠사마의 예술 세계관을 구성하는 핵심 키워드인 ‘환각’, ‘무한’, ‘자아 소멸’을 중심으로 그 철학적, 미학적 의미를 탐구해 보겠습니다.

환각에서 시작된 예술의 씨앗

호박 조각 이미지
호박 조각, 제주 본태박물관

 

야요이 쿠사마의 예술은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심리적 환각 증상에서 비롯됩니다. 그녀는 실제로 10세 무렵부터 색채가 폭발하고, 물체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환각을 경험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당시 느낀 불안과 혼란은 그녀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창작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쿠사마는 자신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그 이미지를 종이에 그리고, 물체에 덧칠하며 정신을 안정시켰고, 이것이 그녀의 시그니처인 ‘도트’와 ‘패턴’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환각은 그녀의 작품 속에서 단순히 표현되는 이미지가 아닌, 세계를 바라보는 렌즈로 작용합니다. 시리즈는 그 증거입니다. 흰 배경 위에 수천 개의 반복된 원형 패턴은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내면의 혼란과 감정이 얽혀 있습니다. 이는 쿠사마가 실제로 심리치료의 일환으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가능한 접근입니다. 또한, 그녀의 초기 드로잉에는 물체가 살아 움직이거나 서로 침범하는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그녀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허물며 자신의 정체성과 감정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결과입니다. 이처럼 쿠사마의 환각 경험은 단순한 정신적 고통이 아닌, 예술적 언어로 치환되어 독창적인 시각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그녀의 작품은 이 환각을 관람객이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단순히 감상이 아닌 ‘몰입’과 ‘공감’이라는 층위로 확장됩니다.

무한에 대한 집착과 공간 연출

무한 거울 방 이미지
무한 거울 방, 제주 본태박물관

 

야요이 쿠사마의 예술 세계에서 ‘무한’이라는 키워드는 단순한 수학적 개념이 아닌, 존재론적 탐구의 상징입니다.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시리즈는 거울과 빛, 구조물을 이용해 ‘끝이 없는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관람객에게 마치 우주 안에 홀로 존재하는 듯한 감각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물리적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감각적으로 무한을 경험하게 하는 실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쿠사마는 거울을 통해 관람객 자신이 반사되고 반복되는 현상을 유도하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이 체험은 공간적 환각이며, 동시에 심리적 환기이기도 합니다. 무한히 반복되는 빛의 점들은 도트 패턴과 연결되며, 그녀의 세계관 속 ‘영원한 반복’이라는 개념을 구현합니다. 또한 쿠사마는 무한을 통해 자기 확장과 해체를 동시에 시도합니다. 무한히 증식되는 이미지 속에서 ‘자아’는 더 이상 중심이 아니며, 오히려 공간에 흡수되고 사라지는 개념으로 제시됩니다. 이러한 연출은 그녀가 평생 앓아온 정신적 불안, 존재에 대한 공포를 예술적 언어로 전환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쿠사마가 이처럼 철학적 개념을 감각적인 체험으로 풀어낸다는 점입니다. 관람객은 작품을 보는 것을 넘어, 작품 안에 들어가고, 작품이 되어버립니다. 이는 쿠사마가 기존의 회화 중심 예술에서 벗어나, 설치미술과 퍼포먼스를 통해 예술을 ‘경험의 장’으로 전환시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아 소멸의 예술과 해방

야요이 쿠사마의 예술세계에서 가장 핵심적이자 동시에 깊은 층위에 있는 주제는 ‘자아 소멸’입니다. 이는 단순히 자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라는 경계를 해체하고 우주적 존재로 확장되려는 시도입니다. 그녀는 일상적으로 입는 의상, 작품 속 캐릭터, 거울방 안의 퍼포먼스를 통해 늘 자신을 이미지 속으로 흡수시킵니다. 이는 자신이 작품의 일부가 됨으로써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허무는 실천입니다. 자아 소멸은 쿠사마가 창작을 통해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정신적 트라우마, 가족 내 억압, 일본 사회의 보수성과 여성 억압 등은 그녀에게 개인적 고립을 강요했지만, 그녀는 이를 무한 반복과 공간 확장을 통해 해소하고자 했습니다. 예술은 그녀에게 자아를 지우고 새로운 질서 안에 존재하게 해주는 ‘치유의 장’이 된 셈입니다. 그녀의 작품 시리즈는 이 개념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순백의 방 안에 수천 개의 스티커 도트를 붙이게 하여, 점차 그 공간이 도트로 가득 찬 무의식적 풍경이 되도록 유도하는 작업입니다. 여기서 ‘내가 붙인 점’은 점차 다른 수많은 점들과 섞이며 사라지고, 관람자는 마치 자신의 흔적이 다른 것과 융합되어 ‘없어지는 듯한’ 감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참여형 예술이 아니라 자아 해체의 은유로 작동합니다. 결국 쿠사마의 세계관은 ‘자신을 예술로 흡수시키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 고통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예술은 자기표현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자기 소멸을 통한 구원의 과정입니다. 자아를 해체하면서도, 예술 속에서 다시 존재하는 쿠사마의 철학은 오늘날 예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깊은 메시지를 남깁니다.

야요이 쿠사마의 예술 세계는 단순한 미학을 넘어서 정신적 체험과 철학적 통찰의 총체입니다. 그녀는 환각이라는 개인적 경험을 예술로 전환하고, 무한이라는 개념을 설치미술로 구현했으며, 자아 소멸을 통해 예술과 존재의 의미를 탐색했습니다. 쿠사마의 작품을 보는 순간, 우리는 그녀의 정신세계 안으로 들어가고, 마치 자신이 사라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게 됩니다. 예술은 때로 개인의 고통을 치유하고, 사회와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통로입니다. 야요이 쿠사마처럼, 우리도 자신만의 세계를 예술이라는 언어로 표현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