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였던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는 단순한 궁정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청력을 잃고 세상과 단절된 그는, 고통과 광기, 공포의 세계로 침잠했습니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그림으로 고발한 고야는 ‘검은 그림들’을 통해 예술의 사회적 책임과 개인의 고통을 동시에 표현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생애와 예술에 담긴 숨겨진 이야기를 따라가며, 인간 존재의 깊이를 그린 진짜 예술가의 면모를 들여다봅니다.
청력 상실 이후 변화된 고야의 세계
프란시스코 고야는 스페인 왕실의 궁정화가로 이름을 알리며 화려한 경력을 쌓았지만, 1793년 불치의 병으로 청력을 완전히 잃게 됩니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과 작품 세계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됩니다. 청력을 잃은 그는 사람들과의 소통이 끊기고, 내면의 세계로 깊이 침잠하게 됩니다. 이후 고야의 그림에는 점차 어두운 색채와 불안한 분위기, 고통스러운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외적인 아름다움이나 이상적 인체보다는, 내면의 고통과 공포, 인간 본성의 혼돈을 주제로 삼게 됩니다. 실제로 고야는 이 시기부터 인간 심리를 파고드는 풍자화와 기괴한 형상들을 그리며, ‘근대의 첫 번째 현대 화가’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판화 시리즈 ‘로스 카프리초스(Los Caprichos)’는 무지, 위선, 종교적 억압, 사회적 부조리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시대를 초월한 예술적 저항의 상징으로 남게 됩니다.
전쟁의 참상, 예술로 고발하다
고야는 스페인 독립전쟁(1808~1814)을 직접 목격하고, 프랑스 나폴레옹 군에 의한 학살과 고문, 민간인의 희생을 생생히 기록했습니다. 그는 전쟁 중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목격하며, 단순한 풍경이나 초상을 넘어 ‘증언자’로서의 예술가 역할을 자처하게 됩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판화 시리즈 ‘전쟁의 참상(Los Desastres de la Guerra)’입니다. 이 작품들은 단순한 예술이 아닌, 전쟁의 공포와 비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시각적 기록입니다. 고야는 군인의 무용담이나 승리의 미학이 아닌, 절망에 빠진 민간인의 표정, 고문당하는 육체, 죽음에 내몰린 아이들을 묘사함으로써, 당시 예술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실 고발 시도를 합니다.
그의 대표작 『1808년 5월 3일』에서는 프랑스군에 총살당하는 스페인 민중의 비극을 그리며, 공포와 저항의 순간을 극도로 드라마틱하게 담아냈습니다. 눈을 크게 뜬 채 총구를 마주한 남자의 모습은 보는 이에게 두려움과 슬픔, 분노를 동시에 전달합니다.
검은 그림들: 고야의 마지막 고백
고야의 삶과 예술은 말년에 극적인 정점을 맞이합니다. 70대 중반, 그는 마드리드 외곽의 작은 집 ‘귀머거리의 집’(Quinta del Sordo)에서 세상의 시끄러움과 단절된 채 살았습니다. 이곳 벽에는 그가 생전에 발표하지 않은 14점의 벽화가 그려졌고, 훗날 ‘검은 그림들(Pinturas Negras)’로 불리게 됩니다.
이 작품들에는 악몽 같은 장면들이 반복됩니다. 인간의 광기, 폭력, 종교적 광신,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이 뒤섞인 형상들은 고야가 삶의 끝에서 본 인간 존재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가장 유명한 그림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삼키는 신의 형상을 통해 권력의 공포와 자기파괴적인 본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인간 내면의 무의식,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상징하는 명작으로 남아 있습니다.
검은 그림들은 일반적인 화려한 예술이 아닌, 고야가 예술을 통해 남긴 가장 개인적이고 충격적인 고백입니다. 그는 이 그림들을 통해 세상에 무엇인가를 알리기보다, 스스로를 마주하고자 했습니다. 침묵 속에서 완성된 이 시리즈는 오늘날에도 인간 본성과 예술의 깊이를 탐구하는 데 큰 영감을 줍니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화려한 궁정화가로 시작했지만, 결국 인간의 어둠과 고통, 사회의 부조리를 담아낸 가장 진실한 화가로 기억됩니다. 그는 청력을 잃은 후 더욱 깊이 있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전쟁과 고통, 죽음을 통해 인간의 민낯을 기록했습니다. ‘검은 그림들’은 단순한 작품을 넘어, 예술가의 내면 탐색이자 시대에 대한 묵직한 증언입니다. 우리는 고야의 그림을 통해 예술이 단순한 미적 표현을 넘어, 인간의 실존을 통찰하고 기록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이제, 고야의 시선을 따라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여정을 시작해 보세요.